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위임통치 청원 사건 (문단 편집) === 대통령을 만나라 === 1919년 2월 5일 이승만과 정한경은 안창호에게 파리행이 비관적이라는 사실에 대해 전했다. 이들은 3가지 대안을 제시했다. 1. 캐나다를 경유하여 프랑스로 간다. 2. [[호머 헐버트]]에게 대신 청원하도록 도움을 요청한다. 3. 강화 회의를 마치고 2월 중순에 돌아올 윌슨 대통령에게 한국 사정에 대해 직접 호소한다. 안창호는 미국에서도 안 되는데 캐나다가 될 리가 있겠냐며 1번을 기각했고 한국인의 문제를 외국인에게 대신 청원해 달라는 것은 옳지 않다고 2번도 기각했고 3번에 대해 해 볼 만하다며 찬성 의사를 표했다. 2월 8일 이승만은 피부병이 발생하여 워싱턴 요양병원에 3주간 입원하였고 병상에서 청원서를 다듬었다. 2월 11일 이승만은 윌슨 대통령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대통령 비서실장 조지프 튜멀티는 대통령의 공무가 바빠서 어렵다는 회신을 25일에 보냈다. 이승만은 23일에 윌슨 대통령에게 편지를 썼지만 윌슨은 이를 국무부에 넘겨 처리하게 하였다. 25일과 26일 양일에 걸쳐 이승만은 미국 국무장관 프랭클린 레인에게 지원을 호소했지만 레인 장관은 식민지 조선의 대표가 [[파리 강화 회의]]에 참석하는 것은 옳지 않다는 미국 정부의 입장을 반복했다. 이에 이승만은 3월 3일 다시 윌슨에게 1882년 조미조약에 의거하여 한국을 도울 것을 요청하는 서한을 보내고 문제의 위임통치청원서를 첨부하여 보내게 된다. 이승만은 자신을 150만 해외한인의 대표자이며 대통령을 면담하고 동봉한 청원서를 직접 전달할 기회를 달라고 요청했고 한국민에게 약소국의 지원자로 알려진 윌슨 대통령을 만나는 것이 [[민족자결주의]]에 고무된 한국인들을 기쁘게 할 것이라고 했고 동봉한 청원서는 국무부로 보내지 말고 자신에게 바로 돌려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튜멀티 비서실장은 대통령이 너무 바쁘다고 이승만의 요청을 또다시 거절했다. 결국 두 달 동안의 노력은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